국내선교칼럼

[한국교회 영성 이해부족으로 ‘오·남용’사례 빈번]-기독교신문

by 관리자 posted Feb 1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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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운동을 현장에서 지도하고 있는 박화양목사는 “영성운동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이지, 영성운동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면서 “한국교회 교인들은 영성운동을 통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바로 알고, 자신의 영적성숙과 내적성장을 가져와야 한다”고 평소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영성운동을 설명하기도 했다. 



■ [혼란한 교회 영성운동 1] “한국교회 영성 이해부족으로 ‘오·남용’사례 빈번” 

지난 수 십여년간 한국교회는 외적인 성장과 더불어 성숙한 교회로의 성장을 위하여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러한 가운데 특별히 80년대 들어서 불기 시작한 영성운동 등은 한국교회의 성장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장이라는 긍정적인 평가의 이면에는 잘못된 영성의 이해에서 오는 혼란과 성장에만 초점을 맞춘 성숙의 결여 등으로 신앙적인 혼란을 거듭해 오고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이러한 영성운동의 방향이 상업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어 기독교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영성운동이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기독교인에게조차 외면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상업적으로 이용 

그러면 한국교회의 영성운동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한국교회의 영성운동은 사회적인 변화와 그 방향도 함께 변화되어 가고 있다는 일반적인 지적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의 혼란과 무관하지 않으며, 상업적인 사이비 영성단체들이 무더기로 창립되고 있다. 이는 곧 사회적인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정치·사회·경제적으로 불안한 상태여서 이러한 영성기관들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영성운동의 의미가 무색해지고 있으며, 교회공동체까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영성운동단체는 기도원을 제외하고 1백여개에 이르며, 이들 단체는 협의회를 조직 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영성운동단체의 협의회 조직은 한편으로 빗발치는 비난을 면키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는 지적과 함께, 상업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영성운동단체를 가려내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된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영성운동단체들은 대부분 한국교회 목회자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으며, 이에따라 목회자들은 교인들이 영성운동 단체에 가는 것을 반대해 왔다. 이것은 일부 영성운동단체가 상업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영성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일부 기도원 원장, 영성센터 원장 등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혼란한 틈을 타 교인들을 대상으로 사기행각(?)을 벌이기도 하고 있어 오늘 한국교회의 영성운동은 상업주의로 흘러가고 있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영성운동단체들은 상업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단체들과 차별화 하기 위하여 영성단체협의회 구성을 서두르고 있으며, 여기에는 도심의 영성센터 및 구국기도원, 상업적인 영성운동가들이 대거 참여 할 것으로 보여 관심을 끈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영성센터를 비롯한 도심의 기도원들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오늘 한국교회 교인들의 올바른 영성훈련이 그 어느 때 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영성훈련을 주도하고 있는 한 목회자의 말이다. 

“한국교회의 영성운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것이 사실이다. 영성운동은 사회적인 변화와 맞물려 있으며, 사회의 혼란한 틈을 이용, 일부 사이비 영성운동가들이 나타나 상업적인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로 인해 건전한 영성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영성운동가들이 도매금으로 매도당하고 있으며, 영성운동단체를 검증 할 수 있는 기구가 매우 시급한 상황에 있다” 

무엇보다 요즘 영성훈련을 내세워 도심 속에 세워지고 있는 영성센터와 임대기도원에 관심이 쏠리고 있으며, 이러한 영성센터와 기도원에 대해서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한편 이처럼 남용되는 영성운동의 이면에는 이를 실질적으로 주도해 온 부흥사들의 책임도 크다. 

사실 한국교회의 영성운동은 지금까지 부흥사들의 부흥운동과 맞물려 신비주의로 흘러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병이나 고치고, 예언이나 해 주는 것을 영성운동으로 이해하는 경향도 있다. 이로 인해 영성운동이 일반교인들과 목회자들로부터 오해받기에 이르렀으며, 상업적으로 흘러가는 영성기관들이 곳곳에 세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교인들을 바르게 지도하지 못하고 영적으로 혼란을 주고 있다는 증거이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무엇보다도 상업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일부 영성단체와 영성센터, 기도원들은 기적과 표적을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기적과 표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한신대학교 교수 예영수 목사의 말이다. 

“기적과 표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해야지, 하나님의 말씀을 기적과 표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해서 안된다. 이것은 분명히 성서에 위배되는 행위이며, 교인들의 영성에 혼란을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교인들의 건강한 신앙생활을 해친다.” 

교회사속의 영성운동 

그렇다면 기독교 영성의 역사는 어디서부터 그 맥을 찾을 수 있는가. 브래들리 P.홀트의 저서 〈기독교 영성사〉를 통해 기독교 영성의 역사를 짚어보도록 하겠다. 

초대교인들은 다음에서 언급하고 있는 주제들을 통해 기독교 영성운동을 시작하고 발전해왔다. 그것은 예배와 성례, 카리스마적 요소, 죽음을 무릅쓴 복음증거, 영성훈련과 수도원운동, 신비주의 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요소들을 통해 초기 6세기동안 기독교의 영성운동이 이룩하게 된 것이다.초대교회 교인들은 공적인 공동예배가 영성의 근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브래들리의 설명이다. 

〈세계기독교의 역사 이야기〉의 저자 김홍기교수(감신대)도 이같이 말하고 있다. 성령의 강림으로 시작된 초대교회는 오순절의 마가다락방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성장했다. 이러한 성령체험의 영성운동은 교회 공동체 속에서 말씀 중심의 예배와 성만찬 중심의 예배를 매주 드림으로써 전개됐다. 이와 더불어 기독교 영성은 세례 속에서 형성됐다. 

기독교 영성은 공동의 유익을 위해 각 신자들에게 주어진 은사인 기독교 카리스마적 요소를 통해 발전됐다. 이러한 은사들 중에는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나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 병자를 고쳐주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 해 주는 등의 특별한 능력도 포함됐다. 이는 초대교회 안에서 오순절사건을 기점으로 중요한 요소가 됐다. 이러한 은사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교회 주위에서 계속 실시되고 있다. 

또한 신약시대부터 시작된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313년까지 계속됐다. 이러한 박해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순교는 모든 영성을 시험하는 기준이 됐다. 또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금욕을 영적 훈련의 하나로 삼았다. 이러한 금욕주의를 강조한 이들은 터툴리안, 오리겐, 에프렘 등이 있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끝나면서 초대교회 교인들은 교회 공동체 속에서의 영성운동보다는 개인적 은둔 생활 속에서의 영성운동에 점차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특별히 이집트 수도원운동, 즉 사막교부인 안토니(250-353)의 은둔적 공동생활 운동은 일반적으로 수도원운동의 시작으로 일컬어진다. 금욕생활을 완전하게 실행하기 위해 사막으로 들어간 이집트인들은 자신을 사막에서 연단하고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하는 삶을 살아 은둔자로서의 단순화된 생활을 지향했다. 

동방교회에서는 성파코미우스, 성 바실 등에 의해 시작되었고, 서방교회에서는 성 아타나시우스, 성 베네딕트 등에 의해 시작됐다. 

동방과 서방에서 발달된 신비주의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과의 합일을 목적으로 하는 영성의 한 형태이다. 이러한 신비주의를 통해 기독교 영성은 형성됐다. 

균형잡힌 영성운동 필요 

특별히 영성운동은 종교 체험과 깊은 관계가 있는데 이는 교회사 속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곧 신비주의와도 깊은 관계가 있으며 이러한 신비주의에서의 영적인 체험은 종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체험을 통한 신 인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신비주의는 객관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요소가 강하다보니 이를 증명하기에 어려움이 많아서 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에 역사적으로 라인홀드 니버 같은 사람들은 신비주의를 역사에 대한 참여의 지평을 상실한 일종의 이교적인 것으로 일종의 ‘이단’ 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폭스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 신비주의적 영성이 상실된 곳에서는 불의와 악이 출현하고 있다고 보면서 정의와 동정심을 본질로 삼는 기독교 신비주의의 전통이 회복되어야할 것을 강조한다. 

문제는 이러한 신비주의적 요소를 담고 있는 영성의 본질이 곧 목회자의 개인적인 훈련을 통한 자신의 영적 성숙과 더불어 교인들의 영적 성숙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이러한 영성 훈련을 위한 행사와 이를 주관하는 단체들이 소위 교인수 늘리기 등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영성은 삶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삶과 깊숙이 관계되어 있는 것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말씀, 묵상 등을 통해 개인이 영적으로 성숙하고 이를 통하여 삶이 변화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목회가 잘 안되다 보니까, 또는 성장이 잘 안되다 보니까 하면서 성장의 방편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에 잘못된 영성에 대한 이해 중 한가지는 소위 기적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말씀의 중요성을 뒤로 한채 병고치는 신유의 기적이나 뒤로 넘어지는(?) 기적 등 은사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소위 병고치는 신유집회나 기적을 베푸는 집회에는 구름 떼처럼 성도들이 몰린다는 것이다. 이로인해 영성의 본질이 흐려진다는 것이다. 

한국기독교영풍회 13대 대표회장을 지낸 비전교회 김정일 목사는 “기적은 말씀을 증거하는 수단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에서 영성운동이라 함은 부흥사들에 의해 뒤로 넘어지거나 병고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 등에 초점을 맞추는 데 있다”고 문제점을 지적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중심, 말씀 중심, 십자가 중심으로 목회자 개인이 변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영성운동의 방향이 지나치게 개인적인 경향에 머무르다 보니 이에 따르는 문제점도 나타나고 있는데 영성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진정한 영성운동의 방향은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역사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장신대 오성춘 교수는 “기독교 영성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요, 성령 안에서 사는 훈련이며, 공동체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는 삶”이라고 규정짓고 “이러한 세 가지 요소중 어느 하나를 더 강조하거나 덜 강조하더라도 참다운 기독교 영성은 이야기 할 수 없다”며 영성의 균형을 강조했다. 

참다운 영성이란 방언을 하거나 병을 고치는 등 성경에서 말하는 기적이 일어나는 은사 등과 분명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영성의 요소들이 삶과 분리되어 있을 때 진정한 영성은 절름발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생활과 단절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절름발이 영성의 강조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질적인 문제를 야기 시키고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영성의 문제를 객관화시키기 위한 학술적인 뒷받침이 절실히 요청된다고 할 수있다. 

기독교신문/유달상부장·윤용상차장·성민혜기자 공동취재·집필 
(1597호. 2001.2.25)